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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는 ‘전체주의적/본질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모습이 1987년 이전 권위주의 시기의 민주주의관과 닮아 있음에 주목한다. 따라서 1987년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민주주의관이 변화할 수 없었는지를 민주화 직후 주요 정치 행위자들의 정치적 경쟁과 실천을 분석함으로 써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1987년 민주화 직후 1990년 3당 합당까지 의 기간, 이 글에서 ‘체제 전환기’로 지칭하는 기간에 주목한다. 이 시기는 각 정치 세력들이 타협 및 협력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전환의 시기’였다(임혁 백 1998, 14-15). 이 기회는 곧 군부 정권의 억압과 이에 대한 저항이 중심이 되었던 기존의 민주주의 실천 맥락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를 마련 할 수 있는 주된 기회였다. 그런 만큼 이 기간 동안 각 정치 세력들이 어떻게 민주 주의를 이해하고 규정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 중 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장에서는 3장에서 제시한 분석틀에 기초하여 각 정치 세력들의 민주주의관 의 변화를 1987년 이전과 그 이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본 연구의 분석에 따르 면, 한국의 주요 정치세력들은 1987년 이전 억압과 저항이라는 맥락 속에서 본질 주의적 민주주의 인식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에도 이러한 모 습은 지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주어진 기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는 결국 3당 합당과 그 이후의 양극적인 갈등으로 귀결되었다.

    1. 보수 세력의 민주주의관과 실천

    1987년 이전 군부 독재 세력의 민주주의관은 전체주의적, 본질주의적 민주주의 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들의 민주주의 주장은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 래, ‘반공주의적 개발동원체제’를 중심으로 한 제한된 민주주의로서 존재하였다 (조희연 2010). 이 시기는 크게 박정희 정권 시기와 전두환 정권 시기로 나누어 접 근할 수 있는데,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에서 형성된 민주주의 인식의 연장선 에 위치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특히 박정희 정권 시기에 형성된 민주주의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출범부터 국민의 뜻, 혹은 자유민주주의 의 회복 등을 강조하며 쿠데타의 정당성을 얻고자 했다. 예를 들어, 1963년 박정 희의 군 전역사는 “국정 문란, 부정, 부패, 독재 등에 의해 4⋅19로 제기된 국민의 뜻과 기대가 배반되고, 자유 민주주의가 장식에 그치며, 민주주의의 형해(形骸)마 저도 위태로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범국민적 혁명이 필요”함을 강조한다(박정 희 1963, 39-40). 그러나 박정희 정부의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본질주의적/전 체주의적 민주주의의 전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첫째, 다원성의 측면에서 정치적 의제(목표)의 당위성과 일원성이 강조되었고, 둘째, 개방성의 측면에서 정치적 의 제를 설정하고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을 비롯한 최고 정치 엘리트의 범위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의 민주주의는 ‘국가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이라 는 소아를 기꺼이 희생하는’ 형태의 민주주의, 강력한 민족 이념에 기초한 ‘민족적 민주주의’의 성격을 지녔다(김종태 2014, 175; 김지형 2013, 178-183). 박정희는 신 생국이자 전근대적 상태에 있는 후진국으로서 빠른 근대화를 통해 ‘후진적인 상 태’에서 벗어나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것을 국가적인, 그리고 민족적인 과제로 설 정하였다(김종태 2013, 92; 2014, 172-175). 박정희가 제시하였던 근대화의 담론은 후진국으로부터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류 사회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발 전 경로이며, 이러한 발전이 곧 민족의 생사를 결정짓는 숙명이라는 점을 전제하 였다는 점에서 타협 불가능한 당위성을 가지는 것이었다(김종태 2013, 85-89). 즉 표면적으로는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주장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는 일정한 절대적/필연적 목표를 향해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엘리트의 지도 에 따라 온 국민이 ‘총화 단결’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여기서 인민들은 정치적 주 체로서가 아니라 정치 엘리트에 의해 설정된 목표를 승인하고 추종하는 역할에 제한되었다. 이에 따라 정권에 대한 반대는 곧 전체 국민의 뜻을 반영한 정부에 반대하는 것 이었으며, 따라서 정치 현장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간주되었다. 민주화 세력이 제기한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나 민주화 주장은 ‘민주주의 소화불량증’, ‘자유를 빙자한 방종, 혼란, 비능률’ 등으로 비판되며 ‘일소되어야 하는 병폐’로서 규정되었으며, ‘국민의 모든 능력을 한 곳에 결집시키기 위한’ 무력 정치의 필요성 을 정당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1964년 한⋅일 협상 반대 시위에 대한 계엄령 선 포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박정희는 “시위는 의사를 표시하여, 정부 시책에 그 뜻을 반영시키도록 하는 한 수단은 될 지언정, 전체 국민의 의사로써 세운 정부를 제약하고, 그 뜻대 로 해줄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지적하는 한편(박정희 1964, 91), “민의 에 의해 선출된 정부를 부정도괴 시키려는 불순한 경향”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 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특히 이것이 ‘국민’ 그 자체보다는 ‘국민이 선택한 정 부’라는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은, 이들의 민주주의관이 결국 정부와 통치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권 그리고 전두환 정권까지 이어진 권위주의 시기의 민주주의관은 민 주화 이후 민정당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민정당은 스스로 규정한 ‘자유 민주주의’, ‘안정과 질서’ 등과 같은 목표가 곧 타협 불가능한 ‘전체(혹은 대다수) 국민의 뜻’임을 천명했고, 자기 당만이 그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의제의 다원성은 물론 의제 설정의 개방성을 인정하지 않는 ‘본질주의적/전체주 의적 민주주의관’을 여실히 드러냈다. 민정당의 이러한 민주주의관은 야당이나 언 론 등 정부에 비판적인 집단들에 대한 폭력적 공격을 묵인하거나 정당화하는 모 습, 그리고 기존에 형성된 법이나 규범을 무시하거나 수정하려는 시도를 통해 나 타났다. 민정당의 본질주의적 민주주의관은 체제 전환기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선거 유 세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노태우 후보는 국민의 뜻이 “안정 속의 민주개혁과 발전”이며 그것은 자신과 민정당만이 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민정당은 선거 과정에서 반복하여 ‘안정 속의 민주주의’가 절대다수 국 민의 뜻, 혹은 ‘국민의 명령’임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민정당은 재야 세 력과의 연계를 구실로 삼아 민주당과 평민당 등 경쟁 관계에 있는 제도권 야당들 을 정당한 정치적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민정당은, 야당이 ‘극렬좌경세력’들 을 제대로 통제하거나 거리를 두지 못하며, 제도권 정당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책임을 포기하고 민주화에 역행하고 국기(國基)를 흔들고 있다고 비판하였다(경향신문 1987/7/16, 1-2). 그리고 ‘야당이 집권하면 좌익 폭력 세력, 과격 세력의 천하가 된다’는 논리를 통해 야당을 정상적인 경쟁자로 인정하 지 않는 태도를 견지했다(경향신문 1987/12/15, 3). 뿐만 아니라 민주화에도 불구 하고 국민으로 대표되는 인민은 자신들이 설정한 목표를 승인하는 수동적 존재로 만 여겨졌으며 인민의 존재는 단지 유세장에 동원된 군중의 ‘수’로만 확인될 뿐이 었다. 민정당의 이러한 민주주의관은, 정치적 반대 시위 등을 원천봉쇄하거나 관련자 를 연행하는 것은 물론, 언론을 직접 공격하거나 공격을 묵인하는 모습, 혹은 야 당을 선동 정치의 주역으로 규정하여 ‘대결’을 선언하는 모습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1987년 9월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된 이후락 전 중앙정부 부장의 인터뷰 보도를 막기 위해 안기부 직원들이 <신동아>와 <월간 조선>의 인 쇄소를 점거하고 출간을 방해한 이른바 ‘신동아 사태’가 발발했을 때 민정당은 이 를 외교 관계와 관련된 ‘국익’의 문제이므로 안기부의 조치는 어쩔 수 없다는 입 장을 취하며 공공연한 언론 탄압을 묵인하였다(조선일보 1987/9/26, 2). 비슷하게 오홍근 중앙경제 사회부장 피습 사건이나 <우리마당> 습격 사건 등과 관련하여서 도 ‘좌경화의 목소리가 크기 때문에 발생한 반작용’이라거나(경향신문 1988/8/27, 1), ‘(사건에 연루되었던) 군의 사기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는 식으로(조선일보 1988/9/1, 2)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김용갑 총무처 장관이 1988년 8월 학생들의 좌경화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야당의 선동을 비판하고 의회 해산권을 포함한 개헌을 주장하며 합의된 규 범을 부정했을 때도 민정당은 ‘시국을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같은 입장이다’라고 말하는 등 그 발언과 취지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한겨레 1988/8/16, 2). 1987년 개헌이 각 정치세력 간의 합의에 따라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는 점, 그리고 민주화 직후에는 민정당 스스로가 개헌 등이 곧 국민의 뜻임을 강조하였 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위와 같은 김용갑 장관의 발언과 이에 대한 묵인, 동조 는 곧 민주화 공간 속에서 합의된 규범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러한 도전들은 결국 1989년 3월 경찰관서 등이 공격 받을 때 총기를 비롯한 무 기 사용도 불사하는 강력한 대응의 요구, 1989년 8월 김대중 총재에 대한 안기부 의 구인 집행, 12월 질서 유지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공직자를 문책하겠다는 대 통령의 언급 등 적극적인 강제력의 활용을 강조하는 모습들로 이어졌다(조선일보 1988/12/11, 1; 한겨레 1989/3/23, 1; 1989/8/2, 1). 요컨대 민정당의 민주주의관은, 다원성의 측면에서 정치적 반대나 정치적 경쟁 자를 공존의 대상으로 보는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했으며, ‘안정적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목표 설정이 철저하게 민정당에 의해 하향식으로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개 방성 측면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민정당은 1987년 이전의 전체 주의적, 본질주의적 민주주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2. 민주화 세력의 민주주의관과 실천

    군부 독재 세력의 민주주의관은 그 자체로서의 중요성보다 정치적 경쟁의 과정 에서 민주화 세력의 민주주의관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 그리 고 그것이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위기를 구성했다는 점에서 더 큰 중요성 을 지닌다. 민주화 세력은 군부 독재의 연장선에 위치한 보수 정당에 비해 민주주 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추구한 집단으로서, 이들이 주장한 민주주의의 형태와 내 용은 곧 군부 독재의 종식 이후 만들어나가야 하는 민주주의의 상당 부분을 구성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세력의 민주주의관과 실천 방식은 군부 독재 세력의 전체주의적, 본질주의적 민주주의관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노정했다. 1987년 이전의 기간을 두고 볼 때, 민주화 세력의 민주주의관은 군부 독재 세력 의 민주주의관과 형태적으로는 유사한 모습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세력 이 주장한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억압적 지배권력으로부터 쟁취하는 것으로 보는 데 그치는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저항담론, 그리고 이를 위해 국민이라는 집 단 주체를 강조하고 이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차이의 정치, 개 별 주체의 역동성과 양립하기 어려운 일원화된 공간을 상정하는 형태로서 이해되 고 주장되었다(김웅진 2018, 237-243; 이상록 2007, 233; 이상록 2010, 188). 이렇 게 제한적인 민주주의 이해로 인해, 민주화 세력은 군부 독재 세력 못지 않게 자 신들이 ‘절대적인 정의’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임지현 2000a, 44-45; 임지현 2000b, 9-10). 한국 정치에 있어 민주주의는 이미 그 초기 단 계부터 다원주의나 개인주의보다는 민족주의와 국가 건설을 위한 개인의 책임과 희생을 강조하는 경향을 가지고 수용되었다(손병권 2021, 30-32). 이러한 상황에 서 군부 독재의 억압적인 통치와 사회의 병영화가 더해지면서, 한국의 민주주의 는 ‘저항’이라는 맥락 속에서 부여되는 이념적, 실천적 목표에 따라 선택적으로 그 구성요소들을 차용한 결과물로서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김지희 2018, 34). 물론 민주화 세력의 민주주의 주장은 그 제한된 형태나마 국민들이 원하는 바 와 완전히 괴리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1976년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이 “우리 민중은 이른바 유신 체제를 거부한다”라고(윤보선·함석헌·김대중 1984, 311) 자신 있게 ‘민중’의 이름을 선언할 수 있었던 데는 국민들의 명시적/묵시적 지지가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내용적으로 노동, 복지, 민족 등 다양한 요소들이 포괄되었다는 점(김웅진 2018, 196-200; 임대식 2003, 14-18)에서 이들 의 민주주의와 관련된 주장들이 군부 독재 세력의 민주주의 주장에 비해 좀 더 넓 은 국민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민주화 세력의 민 주주의 인식과 실천이 상향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데, 민주화 세 력은 민주주의의 근간으로서 민중을 강조하면서도 이들과 민주화 운동 및 담론 을 주도하는 지식인들 간의 관계를 계몽과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인 계도추종의 관계로 설정하는 모순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김지희 2018, 272; 윤상현 2013, 78). 따라서 1987년 이전 민주화 세력의 민주주의 인식과 실천의 방식은 군 부 독재 세력보다는 좀 더 높은 개방성의 수준을 가졌다고 할 수 있지만, 전반적 으로 다원성과 개방성의 수준이 높지 않은 전체주의적, 본질주의적 민주주의 인 식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는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제한적인 민주주의관이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민주화 이후 평민당,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제도권 내 민주화 세력은 ‘5 공 청산’을 타협 불가능한 정치적 목표로 설정하고 민정당과 기득권 보수 세력을 민주적 논의가 가능한 정치적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다원성의 측면에서 명백한 한계를 보였다. 또한 개방성의 측면에서는 한편으로는 일반 민중들과 비 교적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정 수준의 발전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목표(의제) 설정의 주체가 민주화 세력의 지도부에 한정되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한계를 보여주었다. 민주화 초기 1987년 민주화 세력은 새로운 민주주의 작동 원리의 형성과 내면 화의 과제를 달성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한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민정당과 대립 을 이어가면서도 의회와 같은 공론장 내에서의 활동을 거부하거나 이탈하려는 모 습을 보이지 않았다. 재야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평민당은 제1야당으로서 과격주의나 폭력주의와 거리를 두며 온건 개혁노선을 천명하였으며(경향 신문 1988/10/25, 3), 민주당 역시 “극단적인 대결이나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막아 가는 의회주의”를 실현할 것을 선언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 1988/5/31, 3). 각 당 의 이런 약속들 속에서, 13대 국회 전반기에는 대체로 사회의 주요 의제들이 의회 내로 수렴되어, 각 당 간의 경쟁과 갈등이 적어도 ‘제도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하 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박찬표 2014, 113-114).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1990년 ‘3당 합당’으로 귀결된 정치 적 전개는 민주주의를 민주적 숙의와 논의의 과정이 아니라 단순한 ‘수’의 싸움으 로만 이해하는 인식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본 연구는 체제 전환 이후에도 민 주화 세력의 공공선과 정치적 경쟁자를 규정하는 방식이 여전히 민주화 이전의 그것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결과가 예정되었음을 보이고자 한다. 체제 전환 이후 민주화 세력은 두 종류의 경쟁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즉, 외부적으로는 민정당을 상대로 5공 청산이라는 민주화 과 제를 수행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각각 김영삼과 김대중을 필두로 하는 민주당과 평민당 간의 주도권 경쟁이라는 ‘이중 전선’에 대응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 에서 민주화 세력의 민주주의관의 문제는 민정당과의 ‘외부적 관계’ 측면과, 민주 당과 평민당 간의 ‘내부적 관계’의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민정당을 상대로 한 ‘외부적 관계’ 측면에서, 민주화 세력은 민정당의 6·29 선언과 ‘안정 중심의 민주주의’ 주장을 군정 독재의 연장이자 불완전하고 순수하 지 못한 민주화로 비판하며 ‘민주화에 있어서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모습을 공통 되게 보였다. 이는 5공 비리 조사, 국가보안법 등의 개폐 논의, 노동권 보장, 광주 사태 진상조사 및 고발 등 다양한 이슈들을 통해 드러났다. 이러한 순수성에 기초 해서 이들은 민정당을 ‘국민들이 원하는 민주주의의 참된 실현’을 방해하는 존재 로 규정하였다. 민정당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당에 ‘민주화 의 책임’을 묻고 그 실천 의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거나, 정국의 불안이 궁극적으로 민정당의 민주화 실천 미흡에 있는 것이라 비판하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1988년 10월 김영삼이 연설을 통해 “수구 세력의 잇단 준동은 국민에게 도전하는 반민주 적 작태이며 … 그들의 민주화 의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이나 (경향신문 1988/10/26, 3), “기득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이기적 수구 세력과 새로 운 도덕적이고 민주적인 출발을 갈망하는 국민”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한 김대중의 연설은(경향신문 1988/10/25, 3) 이러한 모습의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또 1989년 교황청 방문 당시 평민당 의원들의 ‘추태’를 보도한 조선일보에 대해 평민당이 소 송을 제기하고 보이콧을 시도한 이른바 ‘조평사태’는, 민주적 순수성과 정당성을 확보한 자신들에게는 어떠한 비판도 제기될 수 없다는 일원적인 민주주의 인식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한편 민주당과 평민당 간의 ‘내부적 관계’ 측면은 ‘누가 더 국민이 원하는 민주 화를 잘 달성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경쟁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쟁은 대체로 더 강력한 대중 동원력으로 표현되는 ‘더 강력한 국민 지지’를 강조함으로 써 정국 주도권의 획득을 정당화 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양김이 결국 단일화에 실패하였던 1987년 13대 대선의 과정은 이러한 양상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 는 사례인데, 여기서 각 정당은 민주화뿐 아니라 자신이 집권하는 것이 곧 국민의 절대적인 여망을 반영하며, 유세장에 운집한 인파의 수 등이 이를 보여주는 증거 라고 주장하였다(경향신문 1987/8/28, 2; 동아일보 1987/9/29, 1). 1987년 9월 여의 도 유세와 관련된 신경전이나, 후보 단일화 및 대선 과정에서 상대 후보를 겨냥 한 유인물이 다수 배포되었던 사례(조선일보 1987/8/9, 2; 1987/9/29, 3; 경향신문 1987/10/3, 2) 등은 이러한 주장들의 충돌이 표면화 된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처럼 외부적, 내부적 관계 문제에 있어, 민주화 세력은 각각 자신들의 주장이 나 입장이 곧 유일한 ‘국민의 뜻’임을 강조하며 공공선에 대한 정당화를 독점하고 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은 1987년 이후 민정당이 보여준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개방성의 측면에서는 어떠한가? 우선 평민당의 경우 국민여론에 따라 정치적 결정을 내릴 것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원내 1당이 된 후 김대중은 ‘정기적으로 여론조사를 해서 국민의 생각에 따라 정치를 해 나갈 생각’임을 밝힌 바 있고(동아일보 1988/4/29, 5), 비슷하게 중간평가 등과 관련하여 “올림픽 이후 국민의 여론을 봐가며 최종 결론을 내리겠”다고 발표하 거나, 1989년 내각제 검토 가능성을 내비쳤던 사례, 혹은 광주 문제의 해결에 있 어 광주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마무리 작업에 임하겠다고 하는 등(동아일보 1988/5/7, 3; 경향신문 1989/4/1, 1; 한겨레 1989/6/2, 1) 구체적인 결정의 방향 자체 를 여론조사나 국민여론 등의 결과에 맡기고자 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 나 이미 앞서 다원성의 측면에서 살펴본 것처럼 평민당이나 민주당 모두 ‘국민의 뜻’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모습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들이 국민 이나 민중, 여론을 의식하는 수준은 그 내용에 있기보다는 ‘수’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수준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개방성 증진이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3. 공화당의 민주주의관과 실천

    체제 전환기 4당 체제를 구성한 정당들 중, 공화당은 그 세력이 가장 약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중요성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다른 정당들과 유사하면서도 일정 부분 상이한 민주주의관을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공화당의 이러 한 특징은, 그들이 박정희 정권을 계승하는 군부 독재의 구성원이었으면서도, 동 시에 5공화국 당시 정치활동을 금지 당하는 등 전두환 정권에 의해 피해를 입기 도 했다는 복합적인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김종필과 공 화당은 민주주의의 내용을 제시하는 데 있어 “구공화당의 발전적 연장론”으로(경 향신문 1987/11/10, 3)18) 지칭되었던 보수적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민주화 세력의 주장들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공화당이 보여주는 민주주의관은 다른 정당들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공화당은 우선 민주주의의 달성이 경제 성장의 성과와 그에 기여한 ‘묵묵한 다 수 국민’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특정한 세력의 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규정하 였다. 이는 대선 유세 과정에서 김종필이 “자기들이 거리에 나와서 민주화가 됐 다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만 갖고 민주주의를 할 수 있게 된 게 아니다”고 했던 지적에서(조선일보 1987/9/15, 3)19) 잘 나타난다. 또한 이들은 민정당의 ‘안정’이나 민주화 세력의 ‘5공 청산’과 같이 어떤 목적적인 가치 요소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통치 역량’, ‘경륜’, ‘경험’ 등 절차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 공화당은 다른 정당들 이 ‘흑백논리적 대립’으로만 치닫고 있다고 비판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역량이 중 요함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공화당이 제시하는 ‘국민의 뜻’은 정치 이념에 따른 재편과 정당 간 협조와 타협이라는 수단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규정되었다(조선일 보 1988/12/29, 3; 경향신문 1989/8/7, 3). 이와 같은 공화당의 주장은 민주주의를 타협과 협상, 세력 간의 견제와 균형 이라는 맥락에서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정당들에 비해 좀 더 다원적인 모습 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화당의 민주주의관이 순수하게 높은 다원성을 가졌는지는 다소 의문이 남는다. 이는 공화당의 민주화에 대한 이해에서 나타나 는 ‘근대화론’의 성격 때문이다. 공화당은 박정희 정권 시기의 경제 발전이 안정과 여유를 가져오고, 이것이 교육과 결합되면서 민주화와 복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동아일보 1989/12/26, 5).20) 이러한 이해는 민주주의가 경제 성장 등과 같은 배경 조건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완벽하게’ 달성된다는 점을 전제 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내용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의 필요성은 크게 감소하 게 된다. 따라서 공화당의 인식 속에서 민주주의의 대화나 타협, 그리고 이를 통 해 달성되는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국리민복과 국태민안”은(조선일보 1988/12/29, 3) 숙의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는, 어떤 절대적인 목표로만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공화당의 민주주의관은 정치 세력 간의 협조와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지만, 그 대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목표점’은 이러한 대화와 타 협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일견 모순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볼 때, 공화당의 민주주의관은 일정 부분 다원성의 측면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모순과 공화당 자체의 취약한 정치적 입지가 더 해지면서 실질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다원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개방성의 측면에서 공화당은 여전히 엘리트주의적 민주주의 인식을 보 여주었다. 공화당은 ‘정당들이 ‘색깔’에 따라 경쟁 구도를 재편하고 정렬함으로써 국민들이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한겨레 1990/1/6, 3). 이는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선택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과거 독재체제를 탈피했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의 역할을 정당 엘리트들에 의해 정해진 의제를 선택하는 데에만 제한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화당의 민주주의 인식은 같은 시기 다른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개방성의 측면에서 명백한 한계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