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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민주주의관에 따른 분석틀
연구는 한국을 비롯한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가 민주주의에 대한 특정한 인 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며 이를 분석하기 위해 우선 민주주의의 유형을 민주주의관에 따라 분류한다. 살펴보았듯이 주로 제도적 형태에 기초한 일반적인 민 주주의 분류는 3)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해하는 데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본 연구는 유사한 제도적 조건에서도 주요한 정치 행위자들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는지에 따라 나라마다 혹은 한 나라 안에서도 시기에 따 라 그 정치적 결과는 다를 수 있음에 주목한다. 본 연구가 제시하는 분석틀은 앞서 살펴본 포퓰리즘 관련 논의를 참고하였 다. 포퓰리즘에 대한 분석은, 포퓰리스트들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어떻게 규정하고 어떻게 정치적 상대방과의 관계를 설정하는가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로 장발롱(Rosanvallon 2021, 99-103)은 민주주의의 경계적 형태들(limit forms of democracy)이라는 범주를 통해 대표 선출과 승인의 형식만을 강조하는 최소주 의적 민주주의, 일반의지를 달성하는 응집성 있는 공동체만을 강조하는 본질주 의적 민주주의, 그리고 엘리트와 인민의 이분법을 강조하는 양극적 민주주의 등 의 구분을 제시하였다. 뮐러(Müller, 2021) 역시 통합된 인민, 집단 간의 적대, 국가의 식민화 등의 요소들을 중심으로 ‘가짜 민주주의(fake democracy)’와 ‘진짜 민 주주의(real democracy)’의 구분을 제시하고 있다. 레비츠키·지블렛(Levitsky and Ziblatt, 2018)은 헌법 등 민주주의 규범의 거부, 정치 경쟁자에 대한 부정 및 적대 시, 폭력의 조장이나 묵인, 언론 및 반대자의 기본권 억압 등을 ‘잠재적 독재자’의 판별 기준으로 제시함으로써 민주주의 위기 요인을 제도 자체가 아니라 행위자들 의 제도에 대한 인식, 태도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본 연구는 크게 두 가지 기준에 기초해서 민주주의를 분류한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정치 공간에 참여하는 집단의 범위는 어느 정도인 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참여 집단들 간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이때 범위의 측면은 ‘개방성’으로, 그리고 집단 간의 관계 측면은 ‘다원성’으로 명 명한다. 먼저 개방성은 인민 집단 전체가 참여하는 것과, 인민들은 승인 등의 소 극적 역할만을 부여받은 채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것의 양극단을 가진 연속 선으로 규정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개방성은 투표권의 부여와 같은 양적인 측 면보다는 정치 공간에서의 주체적인 역할(의제를 제시하는 역할)이 얼마나 많은 범위의 집단들에 인정되는가의 문제라는 점이다. 다른 한편 ‘다원성’은 참여자들이 어느 정도로 서로를 ‘정당한 경쟁자’로서 인정하는가, 서로의 의견에 대해 얼마나 기꺼이 논의하고, 타협하고자 하는가의 측면을 반영한다. 이는 ‘공공선’을 ‘절대적/일원적인 것’으로 이해하는지 아니면 ‘구성 적/다원적인 것’으로 이해하는지와 관련된다. 전자는 상대방을 인민이나 국가의 적, 혹은 배신자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타협의 여지를 인정하지 않는 ‘절대 적인 인민의 뜻’, 혹은 어떤 필연적인 목표로서 간주한다. 반면 후자는 상대방을 정치 공간의 ‘충성스러운 반대자(loyal opposition)’로 인정하고, 자신과 상대의 주 장에 대해 기꺼이 양보, 혹은 수용하고자 하는 인식에 기초한다. 이와 같은 기준에 따라, 민주주의 인식 및 실천의 양상을 <그림 1>과 같이 나누 어 볼 수 있다. (A)에 위치하는 민주주의 인식은 절대적이고 타협 불가능한 공공 선, 의제 등의 결정에 있어 인민의 역할이 최소화된 형태를 취하며, 이러한 점에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혹은 ‘본질주의적 민주주의’(Rosanvallon 2021)로 지칭한다. 이 인식 속에서 민주주의는 ‘인민 전체의 의지’를 구현하는 것으로 표명되 지만, 이때 인민은 전체 사회 구성원이라기보다 민족, 계급, 종교 등 특정한 정체 성으로 규정되며 인민의 의지는 그것에 따라 정당화된다. 여기서 인민들은 정치의 주체라기보다 정치 엘리트들이 제시하는 ‘정치적 의제’를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그들의 집권을 승인하는 역할에 그친다. 정치적 경쟁자는 민족, 계급 등으로 표현되는 인민 집단에 대적하는 존재로서 규정되며, 따라서 타협의 여지없이 ‘인민의 이름으로’ 심판받거나 제거되어야 하는 존재로서 여겨진다. 이러한 점에서 이 유 형은 명시적인 권위주의나 독재 체제뿐만 아니라 민주적 선거를 수반하되 자유로 운 비판과 논쟁이 부재한 형해화된 민주주의 체제를 포함한다. 나치즘 등의 파시 즘적인 민주주의, 뒤에서 분석할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 버만(Berman 1998) 이 분석한 독일 사민당의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정의상 이것과 대척점에 위치하는 것이 (D)에 위치하는 민주주의관이다. 여기서 공공선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 간의 숙의와 타협의 결과물이고, 타협의 의제를 설정하고 논의하는 데 가능한 많은 행위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여기서 개별 행위자들은 ‘정당한 경쟁자’, ‘충성스러운 반대자’로 존재한다. 본 연 구는 이러한 민주주의관에 기초할 때 선거나 정당과 같은 민주주의 정치 기제들 이 비로소 이상적인 형태로 작동할 수 있다고 본다. 어비나티(Urbinati 2006)가 제시한 숙의성이 강조되는 대의제, 랑드모어(Landemore 2020)가 제시한 개방형 민 주주의(Open democracy)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 (B)와 (C)는 앞의 두 유형의 특징들이 혼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B)는 (A)와 유사하게 정치 목표로서의 공공선이 숙의와 논의의 과정을 통한 구성의 대 상으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그 내용을 인민 집단이 직접 결정하는 경우를 의미한 다. 민주적 논의 과정보다는 여론조사나 국민투표 등을 통한 인민 의지의 직접적인 반영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 체제로서, 이는 ‘신임투표적 민주주의(plebiscitary democracy)’로 지칭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여론조사나 다수결 등 의 수단을 활용한다는 점이 아니라, 이러한 수단의 활용이 정치적 숙의의 과정을 완전히 대체한다는 데 있다. 한편 (C)의 경우는 참여의 범위는 적지만, 다원성을 반영하는 타협과 숙의의 기능은 작동하는 경우이다. 주된 정치 현장은 정당 간의 경쟁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그 공간은 일반 인민들이 아닌 좁은 범위의 정치 엘 리트들에 의해 전유된다는 점에서 이 민주주의는 ‘엘리트 중심적 대의 민주주의’라고 지칭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에는 슘페터(Schumpeter 2016)가 제시한 최소주 의적 민주주의, 혹은 시험이나 일정한 기준을 통과한 사람들이 정치 과정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브레넌(Brennan 2016)이나 밀(Mill 2012)의 능력주의적 민 주주의 주장 등이 포함된다. 본 연구는, 각 사회마다 정치 행위자들은 이상의 분류틀에 따른 민주주의 인식을 가지며, 그에 따라 유사한 선거와 정당, 통치기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내 부적인 작동 원리는 물론 그 정치적 결과도 다를 수 있음에 주목한다. 이러한 분 석틀에 기초하여 본 연구는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분석하고자 한다.
2.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검토
최근 한국 정치에서 제기되고 있는 민주주의 위기의 문제는 무엇보다 진영 간 타협 불가의 정치적 양극화에 있다. 한국 정치 양극화에 대한 연구들에 따르면 한 국 유권자들과 정당 지지자들에게는 정당 간의 적대적 대립에 기초하여지지 정 당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정서적 양극화의 경향, 상대 정당에 대한 부정 적 반응의 강화가 나타나고 있다(하상응 2022a, 337; 권구선 2022; 길정아 2019 김기동⋅이재묵 2021; 박준 2022; 이내영 2011; 정동준 2018). 또한 이렇게 심화된 심화된 고 있는 양극화의 경향은 사람들이 정치 외에 가지는 사회적 관계나 다른 외부 집 단에 대한 인식, 혹은 정치 경쟁에 새롭게 등장한 후보에 대한 판단 등 여러 판단 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 역시 확인되고 있다(길정아 2019; 장승진 2021; 하상응 2022b). 민주적 정치 제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정 치적 양극화는 최근 ‘팬덤 정치’로 지칭되는 ‘지지 정당 혹은 정치인에 대한 무비 판 적이고 맹목적인 지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한국 민주주의의 병리 적 현상은 민주주의 인식과 관련된 한국인들의 두 가지 특징에 기초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한국인들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된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는 낮은 반면 여전히 견제받지 않는 강한 리더십을 선호한다는 것이며, 둘째, 정치 참여의 방식이 투표 참여 등 소극적인 측면에 제한된다는 것이다.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 Survey; 이하 WVS)에 따르면 6한국에서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된 민주주의에 대한 긍정 응답 비율은 낮은 데 비해 강한 리더에 대한 긍정 응답 비율은 다른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 비해 조사 기간 전반적으로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WVS에서는 90년대 후반에 진행된 3차 조사 (Wave 3)에서부터 서로 다른 대안적 정치 체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평가를 조사해 왔다. 여기에는 ‘의회나 다른 기구의 견제를 받지 않는 강한 리더에 의한 통치’, ‘전문가가 중심이 된 통치’, ‘군대에 의한 통치’, ‘의회와 정당이 된 민주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견제받지 않는 강한 리더’에 대한 긍정 응답(매우 좋음과 좋 음 응답의 합)의 수준은 90년대 중반부터 조사가 이루어진 이래 최근으로 올수록 높아지고 있다(31.7% → 66.8%). 이는 긍정 응답이 크게 변화하지 않는 다른 자 유 민주주의 국가들과 비교할 때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모습이다. 다른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을 놓고 볼 때, WVS의 3차 조사(Wave 3)와 7차 조사(Wave 7) 사이의 강한 리더에 대한 긍정 응답 비율의 증가량은 미국 13.4% p, 독일 10.9% p, 일본 0.8% p, 영국 2.5% p 등이었으며, 스웨덴의 경우 오히려 6.8% p 감소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변화는 약 35.1% p가 증가한 한국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긍정 응답의 전반적인 수준 역시 이들 국가들에서는 20~30%대에 머물고 있으며, 강 한 리더와 상반되는 의회와 정당 중심 민주주의에 대한 긍정 응답은 이들 국가들 모두에서 80~90% 수준으로, 70% 수준의 긍정 응답을 보이는 한국과는 차이가 존 재한다. 통치의 주체가 의회와 정당이 아니라 ‘견제되지 않는 강한 리더’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관점은 정치 참여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관련된 연구들을 살펴보면, 한국 대중들은 전반적으로 일상적인 정치 활동(견해 표현, 집회 참가 등) 보 다는 투표와 같은 공식적인 참여 방식을 더 선호하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일반 대중보다 좀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포퓰리스트 성향의 유권자들에게서도 동 일하게 나타났다(정병기·도묘연 2021, 209-210). 이러한 점은 정치인이나 기자와 의 접촉, SNS에서의 의견 표력, 후원금의 납부, 집회나 시위의 참여 등 비선거적 정치참여가 매우 낮은 수준으로 머물고 있다는 김태완(2015, 63)의 지적과도 연결된다. 8) 또 비선거적 정치 참여가 일정 정도 증가했다 하더라도 그 참여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일정한 문제점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송경재(2017, 62-63)는 한국에서 일부 포착되는 정치참여의 적극성은 정부와 정치 등에 대한 공적 신뢰 하락과 연 결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민주주의에 장기적인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한국에서 단체에 대한 참여는 혈연, 지연, 학연 등을 중심으로 하는 일차 단 체들을 중심으로 하기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더라도) 민주주의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확인되기도 하였다(배정현 2014, 174-175). 2000 년대 초 큰 폭으로 확장된 온라인을 통한 정치인과 시민 간의 접촉은 상호작용적 토론, ‘심층적 글쓰기’보다는 댓글달기와 같은 즉각적인 감정과 반응의 표출을 중 심으로 하고 있었다는 지적 역시 존재한다(이원태 2005, 124). 이러한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현재 한국 민주주의는 선거 등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높은 수준을 보이지만, 이것이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나, 정치 공간에서의 다원적인 숙의와 타협의 문제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서구와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정치 문화, 의식, 정치 행태에 안착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지적(김 웅진 2018, 47), 한국의 민주주의가 선거 민주주의와 자유-시민 민주주의 사이에 서 그 발전이 정체되어 있다는 김용철(2016, 50)의 지적, ‘메시아적 리더’에 의한 일방적인 해결의 심리가 강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강원택(2016, 26-32) 등의 지적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한국 정치는 1987년 민주화와 이후의 제도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작동을 정치 엘리트, 그것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 엘리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집중성과 독점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림 1>의 분석틀에 기 초하여 볼 때 현재 한국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이상적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숙의적 참여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전체주의적/본질주의적 민주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