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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성공적으로 공고화된 민주주의로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처럼, 한국 민주주의는 정치 이 슈가 정치 세력 간의 숙의나 타협에 의해 해결되지 못하는 ‘타협 불가능의 정치적 양극화’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 정치에서 상대 정치 세력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적 태도를 의미하는 양극화의 경향은 90년대 중반 이후 오히려 심화되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박준 2022, 31) 최근에는 ‘태극기 부대’나 ‘개딸’과 같은 팬덤 정치 현상으로 악화되어 왔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양극화가 지지 정당 혹은 정치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에 기초해서 공적인 장에서의 자유로운 의견 표출과 이성적인 논의를 방해함으로써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를 노정한다는 데 있다. 한국 정치의 이러한 타협 불가능의 양극화 문제는 왜 나타나는가? 그러한 문 제들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한국 정치의 양극화와 타협 불가능성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공식적/비공식적인 정치 제도의 측면과 정치 문화의 측면에 주목한다. 제도적 관점에서는 주로 한 국 통치체제의 제왕적 대통령적 특성이 한국 정치의 논의 구조를 방해하고 비타 협성을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해결책은 의원내각제로의 통치구 조 개편이나 최소한 양당체계를 해소하는 선거제도의 개혁으로 제시된다. 한편 문화적 관점에서는 무엇보다 유교문화의 전통에서 비롯되는 강한 리더십에 대한 선호를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들은 무엇보다 민주화 이후 제도 개선의 시 도와 문화적 상황의 변화가 이어지고 있음에도 왜 동일한 문제가 지속, 심화되고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한계가 특정한 제도적 혹은 문화 적 요소의 존재가 그 자체로 긍정적/부정적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보는 ‘블랙박스 (black box)’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본 연구는 제도적, 문화적 요인으로 설명될 수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 해하기 위해서는 제도와 문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독특하게 인식하고 실천하는 행위자들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한국 정치를 구성하는 주요 정치세력들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가의 문 제, 즉 실천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행위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즉 ‘민주주의 한국의 민주주의관과 민주주의 위기  3 관’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본 연구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구성하는 타협 불 가능의 정치적 양극화가 한국의 민주주의관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본 연구가 주목하는 것은 한국에서 실질적인 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되었던 1987 년 민주화 전후 주요 정치 세력들의 민주주의관이다. 본 연구는 박정희 정권 이후 권위주의 정권에서 수립된 ‘전체주의적/본질주의적 민주주의관’이 민주화 세력의 독재에 대한 투쟁의 과정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고 민주화를 통한 제도적 전환에 도 불구하고 이후의 정치적 경쟁의 과정에서 지속되었음을 주장한다. 또한 본 연 구는 이 시기 형성된 한국의 민주주의관이 무엇보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를 이해하는 데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본 연구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우선 II장에서는 한국 정치의 양극화와 타협 불 가능성 문제에 대한 기존 논의들을 비판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대안적 접근 방법을 제시한다. III장에서는 본 연구의 분석틀을 제시하고 이에 기초해 현재 한국 민 주주의의 모습을 분석한다. IV장에서는 III장의 분석틀에 기초해 1987년을 전후로 한 기간 동안 각 정치 세력들의 민주주의 인식과 실천의 방식을 살펴본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이상의 내용을 정리, 요약하고, 본 연구의 실천적 시사점을 제시하고 자 한다.

    이론적 논의

    기존 논의 검토

    한국 정치의 양극화와 타협 불가능성의 문제에 대한 기존 논의들은 크게 제도 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제도적 측면의 논의들은 통치구조 나 정당체계와 같은 제도적 구조가 한국 정치에서 숙의나 타협이 잘 일어나지 안 도록 하는 요인이 된다고 분석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대통령제 자체의 이원화된 정통성, 한국 대통령에게 부여된 막강한 권한과 정치적 영향력 등과 같은 한국의 헌법 및 정치 제도의 내용과 특성이 ‘제왕적 대통령’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고, 이 것이 한국 정치의 양극화와 타협 불가능성을 심화한다고 지적한다(김용호 2017; 양재진 2002; 장영수 2017; 홍득표 2002). 또 나아가 건설적 경쟁을 수반하는 다원 적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대통령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양당제 정당체계를 다당제로 바꿀 수 있는 선거제도의 개편이나 대통령제를 의원 내각제로 변경하는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강원택 2016; 박상훈 2017). 한편 문화적 측면의 논의들은 한국 정치에 존재하는 권위주의 문화, 혹은 유교 문화 등이 각 정치 세력 간의 타협을 어렵게 만들거나, 혹은 타협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의 마련을 어렵게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김의철(2002), 지병근(2013)과 같은 연구들은 설문조사 등에 기초하여 한국인들이 강하고 도덕적이며 가부장적인 리더십을 가진 정치인들을 선호하며, 경제성장 우위의 가치체계와 행정부 중심의 권력구조 및 국가의존적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선호를 내면화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비슷하게 김영명(2007; 2011)은 ‘단일 사회 문화’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 정 치가 하나의 사회정치적 집단으로 구성된 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 해 정치적 경쟁이 편협한 당파 싸움, 일인지배와 계파정치 등의 특징적인 현상과 문제들로 나타난다고 분석한다. 이희완·이헌경(2007)도 한국의 유교정치 문화가 권위에의 강한 복종, 보수주의, 인습주의 등을 초래하며, 이것이 관료들의 권위주 의적 행태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주장을 제시한 바 있다. 앞서 살펴보았던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를 다루는 논의들 중에서도 그 원인과 대안을 유교적 전통과 권위주의적, 수직적 정치문화의 존재, 그로부터 선호되는 영도자적, 군주적 대통령상에서 찾는 경우 역시 찾아볼 수 있다(김병문 2013; 김용복, 2007; 박용수 2016; 양 건 2003; 이금옥 2018). 그러나 이와 같은 접근들은 한국의 제도적, 문화적 특성을 잘 설명하고 있음에 도 불구하고 특정한 제도나 문화가 한국 정치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예를 들어, 제도적 측면에서 제왕적 대통령 제를 다루는 연구들에 대해, 87년 헌법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견제책이 마 련되었고, 따라서 오히려 다른 나라의 대통령에 비해 그 권한이 특별히 강하다고 볼 수 없다는 반론들이 제기되기도 한다(박용수 2016, 41; 함성득 2002, 104). 비 슷하게 문화적 측면에 있어서도 한국의 정치 문화에서 ‘유교’가 지배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역시 제기될 수 있다(김영명 2010, 79-84). 비단 한국과 같은 유교적 정치문화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문화(democracysupportive political culture)’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독립변수’로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견이 존재하기도 한다(Beetham 1994, 167). 무엇보다 이러한 접근법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는 특정한 제도적, 문화적 요 인의 존재가 곧 특정한 정치적 결과—‘민주주의의 성숙’ 혹은 ‘민주주의의 쇠퇴’ 등—로 이어질 것이라는 ‘블랙박스’ 관점을 취한다는 점이다. 레비츠키·지블렛 (Levitsky and Ziblatt, 2018)이 소개한 다양한 사례들은 이러한 ‘블랙박스’의 전제 가 한계를 가질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미국 헌법을 충실하게 모방하였던 남미의 페론이나 필리핀의 마르코스 등 ‘민주적 독재자’들은 ‘민주적인’ 제도의 존재가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민주 정치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었다’고 평가되던 미국 정치(Tocqueville 1997, 404)에 서도 휴이 롱이나 매카시와 같은 전제주의적 선동가들의 위협이 반복되었다는 점 역시 문화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쇠퇴나 성숙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1) 한국 민주주의 역시 민주주의 다양성 조사(V-Dem) 등을 통해 비교의 관점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자유민주주의로 분류되는 국가들 못지않은 민주주의 발 전을 이룬 것으로 평가됨에도, 앞에 설명한 것과 같은 위기와 문제 상황을 마주하 고 있다. 또 유교문화와 같은 특정한 문화적 요소는 그 자체로 권위주의적 정치 행태와 1987년 민주화와 같은 개혁적 역동성을 모두 포함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요컨대, 제도나 문화적 요소들은 그 자체로 특정한 정치적인 결과를 만들어내 지 않는다. 이 요인들은 정치 공간 속의 행위자들에 영향을 미쳐 일정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형태로 작용하며, 따라서 행위자들의 의식적인 노력(일탈, 재해석, 순 응 등)에 따라 그 효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대안적 관점

    본 연구는 한국 정치에서 타협 불가능성이 왜 지속되고 강화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제도나 문화와 같은 ‘일차적인 변수’뿐 아니라, 그 일차적 변수들이 특정한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이차적 변수’, 즉 정치 행위자에 대한 고려가 필 요함에 주목한다. 연구가 민주주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서 민주적 제도나 문화 그 자체가 아니라 행위자에 주목하는 이유는,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실험적(experimental)이고, 행위자들의 실천 과정 속에서만 그 실질적인 작동의 원리를 파악할 수 있는 유동적인 개념이라는 데 있다. 실제로 민주주의가 ‘인민의 통치’라는 모호한 기 본 개념 이상으로 어떤 의미를 포괄하는가에 대해 뚜렷한 합의 역시 존재하지 안 는다(Coppedge et al. 2022, 5; Rosanvallon 2021, 155). 그런 만큼 각 사회 발전의 역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변화하는 민주주의는 행위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방향으로 정의되고 작동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서구 정치와 한국 정치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는 선거, 의회제와 같은 동일한 기제들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각 사회에서 지칭되는 민주주의 개념은 다를 수 있다(김웅진 2018, 59). 따라서 민주주의는 행위자들이 민주주의 자체를 이해, 해석하고 활용하는 방식에 초점을 두어 분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이른바 ‘아이디어 접근법(Ideational Approach; Ideamatters Approach)’으로 지칭되는 논의들에 주목한다. 이 관점은 기존 제도나 문 화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더 중요하게는 경험과 실천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행위자들의 제도, 문화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따라 그것의 실질적인 작동 방식뿐 만 아니라 결과 역시 달라짐을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버만(Berman, 1998)은 유사한 조건에 있었던 독일과 스웨덴 양국의 사민당이 전간기 위기 상황에서 서로 다른 대응을 보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차 이가 각 정당들의 아이디어(ideas)와 정책적 유산에 의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스 웨덴 사민당은 보다 유연하고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기 에 필요한 경우 선거와 의회주의, 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 가능성 등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데 비해, 독일 사민당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조 적인 이해에 기초해 고립되고 경직적인 태도를 고수함으로써 정치적 실패를 겪었 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각 정치 행위자가 가진 ‘아이디어’가 주변의 제도적, 환경적 요소들이나 다른 행위자들(이 경우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이해와 태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정치 공간 내에서의 상호작용 및 상황 변화에 대한 대응 양상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 특정한 결과(전간기 위기 대응에 대한 성공 혹은 실패)로 이어지게 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권형기의 연구(2022)는 전간기 독일의 정치적 실패가 단지 사민당의 교조적 이념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요 정당들이 공유했던 민 주주의관에 기초해 있음을 주장한다. 권형기에 따르면 전간기 독일은 발전된 민 주주의 제도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의지가 단일하게 통 합’된 것으로 전제하는 ‘본질주의적 민주주의관’을 공유하였고, 이것이 매개 없는 인민 의지의 직접 표현에 대한 선호와 나치당의 등장 및 지지 확산으로 이어졌다 (권형기 2022, 243). 이 연구는 표면적으로는 정치 세력들 간에 일정한 민주적 경 쟁이 존재하더라도 그 기반이 되는 ‘아이디어’로서의 민주주의관이 다원적이고 자 유주의 적이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쇠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행위자들 의 제도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최근 활발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포퓰리즘과 관련된 논의들 역시 각 행위자들이 민주주의와 그 속에서의 정치적 경쟁자 등에 대해 가진 이해에 중심을 두고 ‘민주주의의 위기’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관련 연구들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사회를 도 덕적으로 순수한 인민과 부패한 엘리트 간의 적대 구조로 이해하며, 인민들의 의 사를 직설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세계관으로 정리된다(정병기 2021, 7; Müller 2016, 19).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은 다원주의 인식의 거부, 단일하 고 유일한 공공선 형태의 ‘인민의 뜻’ 정의, 이를 직접적으로 반영할 단일하고 독 선적인 리더십과 대표 방식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Müller 2016, 32-38). 이러한 관점과 기존 연구들에 기초하여, 이 글에서는 민주적 정치 제도와 문화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정치적 양극화와 진영 간 타협 불가능성의 상황이 심화되고 있는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주요 정치 세력들의 민주주의 인식과 이에 기초한 민주주의 실천 방식을 분석하고자 한다. 본 연구가 주목하는 것은 1987년 민주화 전후에 형성된 한국 민주주의관의 특징이다. 1987년 6 · 29 선언 직후 한국 은 군부 독재를 청산하고 투쟁적인 형태의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로 전환해야 하는 시기였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의 전환 없이 제도 적 전환에만 머무르면서 현재 한국 정치가 마주한 타협 불가능성의 문제가 지속되고 강화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체제 전환기의 주요 세력들인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평 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을 대상으로 이들이 ‘국민’ 혹은 ‘대중’과의 연결 속에서 민주주의의 내용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에 기초해 정치적 경쟁 관 계에 있는 다른 정치인이나 정치 집단들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등을 살펴본다.